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1강: 예기치 않은 순례: 무신론에서 믿음으로 향한 철학자의 여정

realsoulmate 2025. 4. 13. 17:44
728x90

1강: 예기치 않은 순례: 무신론에서 믿음으로 향한 철학자의 여정

1. 서론

존경하는 무신론자 여러분, 비기독교인 그리고 믿음이 약한 벗들에게...

저는 오랫동안 여러분과 같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20년 넘게 대학교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특히 기독교의 유일신관이나 구원관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우곤 했습니다. 신을 믿는 행위를 어리석은 종교적 행위로 치부했고, 때로는 무지성적인 맹신이라고 단정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시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경제 성장과 함께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전통적인 가치관은 흔들렸습니다.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에서처럼, 젊은 세대는 과거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기 시작했고 , 사회 전체적으로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은 약해져 갔습니다. 아파트 부실 시공과 같은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신뢰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고 , '믿음 없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마저 나왔습니다.  

 

대중문화 역시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했습니다. 과거에는 팝송을 듣는 것이 고학력 중산층 문화로 여겨졌지만 , 점차 다양한 장르가 등장하며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아이돌 그룹의 팬덤 문화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 동시에 '내로남불'과 같은 신조어가 등장하며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러한 세상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철학은 제게 많은 통찰력을 주었지만, 궁극적인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깊이 파고들수록 세상은 더욱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 삶에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오랜 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 갑자기 열리듯, 불가항력적인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제가 그토록 비판하고 어리석다고 여겼던 기독교 신앙이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들어왔습니다. 믿고 싶어서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믿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제 스스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과거의 저와 같이 기독교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에게, 제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제 철학적 지식과 사고를 통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여정은 제게 일생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에게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삶의 깊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의 작은 시작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 본론: 회의론에서 증언으로 - 철학자의 믿음의 여정

저는 오랫동안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인간 중심의 철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이성과 논리를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하려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신의 존재, 특히 기독교의 하나님은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인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후, 저는 제 기존의 철학적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 변화는 단순히 감정적인 흔들림이 아니라, 제 지적 토대 자체를 뒤흔드는 강력한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비판했던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악의 존재였습니다. 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는 수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둘째, 기독교의 유일신관과 유일한 구원관은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는 독단적인 주장으로 느껴졌습니다. 셋째, 과학적인 증거 없이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은 이러한 저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그 경험은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제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치 파스칼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철학자의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고백했듯이 , 제가 만난 예수님은 제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신과는 전혀 다른, 살아있는 인격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 저는 과거에 제가 가졌던 기독교에 대한 철학적 비판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고찰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악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 신학은 다양한 답변을 제시합니다. 악은 단순히 선의 결핍일 수도 있고 , 인간의 자유 의지의 오용에서 비롯될 수도 있으며 , 더 큰 선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설명들이 모든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학이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기독교의 유일신관과 구원관에 대한 저의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과거에는 이를 배타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기독교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스승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다른 종교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 진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도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과학적 사실과 종교적 믿음이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과학과 신앙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진리를 탐구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자연 세계의 법칙을 탐구하고 설명하는 데 탁월하지만, 인간의 존재 이유나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같은 질문에는 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기독교 신앙은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제 회심은 결코 비판적 사고나 철학적 탐구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제 기독교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 지식과 사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철학이, 이제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변증하고 옹호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 것입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제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여전히 많은 질문과 의구심이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제 삶의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으며, 그분 안에서 저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섣불리 믿음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경험한 이 놀라운 변화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제가 깨달은 진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혹시라도 마음 한 켠에 작은 호기심이라도 생겼다면,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여러분도 제 삶의 예상치 못한 순례처럼, 놀라운 믿음의 여정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강의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철학적 토대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 글은 여러 실존 사상가들의 삶과 신앙을 바탕으로 창조된 상징적 인물을 통해 서술된 글입니다.”

728x90